[서평] 그리스인 조르바; 고전은 우리에게 보편타당한 감동을 줄 수 있는가

그리스인 조르바니코스카잔차키스 지음이윤기 옮김열린책들, 2017년 신판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게 된 연유는, 그리스 여행을 준비하면서 문득 딱딱한 역사나 뜬 구름잡는 신화 이야기보다는, 현대 그리스를 관통하고 있는 그네들의 감성의 흐름을 따라잡고 싶은 욕심에서였다. 이 책은 꽤나 많은 지식인(?)들 사이에서 추천도서로 꼽히는 책인데, 간혹 어떤 분들은 20대에 꼭 읽어야 하는 책이라고 강연도 하시더라.
 
그런데 딱히, 그리스 여행을 다니며 이 책을 탐독한 나에게는 그러한 감동이나 깨달음은 그다지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의미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닌게, 책의 화자와 조르바를 통해 그리스 현대사를 다소 엿볼 수 있었고, 당시의 평범한 그리스인, 혹은 크레타인이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쓴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현대 그리스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서, 19세기 후반에 그리스에서 태어나 유럽 각지를 다니며 자유에 대한 갈망을 보여주는 작품을 쓰게 된다. 그리스라는 나라는, 아니 현대 그리스는 생각보다 우리에게 친숙한 나라는 아닌데, 동로마제국의 멸망 이후 450여년 간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받으며 이렇다 할 족적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유럽문명의 어머니라 할 수 있을 수준의 그리스는(유럽이라는 단어의 어원 자체가 그리스 신 중의 하나인 에우로페(Europe)이기도 하다), 오스만제국의 힘이 줄어들 시기에 유럽 열강들의 도움을 받고 독립을 쟁취하게 된다. 하지만 그 동방정교회를 중심으로 발흥된 민족주의는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공화국과 왕국을 오고가며 정치적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쓰여진 책이 이 그리스인 조르바이다.
 
니코스카잔차키스는 1902년 아테네 대학의 법학과에서 공부를 하고, 36세에 그리스 공공복지부 장관에 임명될만큼 당대의 지식인 계층이었다. 물론 당시 지식인이라 함은, 그만한 부도 같이 갖춘 사람일 것이다. 그런 그가 조르바와 같이 많이 배우지는 못 했지만 인생의 경험이 풍부한 사람을 만나며 윤리, 종교, 조국 등의 틀을 깨버리는 모습은 꽤나 흥미로운 이 소설의 요소이다.
 
하지만 소설은 일백년 전 세상의 모습을 보여주는 만큼, 조르바의 전근대적인 행동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다소 낯설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정교회와 같이 지나치게 Orthodox, 그러니까 융통성이 없고 편협하고 완고한 수준의 기독교사회를 살아가지도 않은 우리에게, 더 이상 애국이라는 가치가 지상과제가 아닌 우리에게는 미칠 수 있는 감동의 수준이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이미 백여년의 시간을 보내며, 인류는 볼셰비키 혁명을 일으켰고, 세계대전, 대공황, 미소냉전 이데올로기 대립의 시대, 중국이라는 공산주의 체제 하의 자본주의를 경험하기도 했다. 물론 그 긴 시간동안 종교라는 억압은 적어도 기독교권 문화에서는 많이 퇴색되어 더이상 우리에게 큰 굴레는 아니게 되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더 이상 조르바의 과감한 갈지자 행보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딱히 감흥을 느끼기 어렵게 만들고, 조르바의 행동을 그대로 2019년의 한국에 가지고 온다면 언제든지 철컹철컹 성범죄로 갈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그가 보여줬던 이성적인 사고는, 당시 그리스, 크레타의 낙후된 민중의식 속에서는 신선하고 빛을 발해줄 수는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빛은, 딱 거기까지라는 말이다.
 
니코스카잔차키스는 1957년 생을 마감하며 묘비에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그런 자유, 분명 1957년에는 필요했을 수 있다. 하지만 60여년이 지난 2019년의 오늘, 그가 추구했던 자유는 꽤나 많이 실현되었을 수 있고, 조르바에서 보여주는 윤리적 자유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그다지 지속가능하지 않은, 누군가에게는 큰 상처를 줄 수 있는 잘못된 도구일 수 있다.
 
2019년에는 현역 지자체장이자 한국의 유력 대선후보였던 사람 중 한 명이 수행비서를 수차례 성폭행, 성추행한 혐의로 2심에서 36개월의 실형선고를 받고 법정 구속이 되었다. 아마도 조르바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러한 것은 무슨 죄라고 항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유로운 윤리, 종교, 정치적 사상, 다 좋다. 하지만 그러한 윤리의식이 잘못 사용되었을 때 누군가는 죽고싶을 만큼 괴로울 것이며, 그러한 종교적 사상이 잘못 사용되었을 때 사이비종교와 같이 수많은 사람들을 파탄에 이르게 할 수 있다.
 
잘못된 정치적 사상은, 카잔차키스가 당시 인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소련과 중국의 수천만 명에 이르는 희생자를 양산할 수 있게 된다. 자유, 누구에게나 자유는 주어질 수 있다. 하지만 그 자유를 지나치게 낙관적으로만 볼 수 없는 것이, 21세기를 공존하는 우리가 지향해야 할 자세일 것이다.
 
고전은, 그렇게 무조건적으로 찬양을 하고 중고등학생들에게 필독서로 읽히게 할 것이 아니라, 그 고전이 가지고 있는 시대적 배경에 따른 현대적 해석, 한계 등을 인지하게끔 알려주는 것, 그것이 참교육의 자세가 아닐까 싶다. 특히나 이러한 윤리적, 종교적 고민의 맥락은, 중고등학생들이 체감하기에는 다소 어렵지 않을까 싶다

이런 책을 중고등학생들에게 추천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사람의 의도를 한번 물어보고 싶다. 이 책을 통해 미성년자가 깨우쳐야 할 삶의 자세는 무엇일까요? 카잔차키스는, 대문호의 반열에 오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미래에서 온 어느 필부에게는, 그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사회체계 속에서 갈팡질팡하는 지식인에 불과해 보인다.

댓글

  1. 잘 읽었습니다. 이 소설을 워낙 좋아하던 저로서도 이 깔끔한 글의 논지는 인정하지 않을 수밖에 없네요. 무조건적인 추천과 예찬이 아니라 일정 부분 거리를 둔 독서, '좋은 점 끄집어내기'가 절실한 작품이 아닐까 싶습니다.

    선생님, 페이스북 메시지도 드렸는데... 저는 도서출판 사이드웨이를 운영하고 있고요. 그간 써오신 글들이 너무 좋아 저술 작업을 제안/요청 드리고 싶은데 연락을 취할 방도가 없어서요. 메일 주소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 메일은 sideway.books@gmail.com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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